[한국방송작가협회-방송작가 2018년 11월호]에 실린 글

 

외국어 능력이 들쭉날쭉한 사회에서 외국어를 남용하는 일은 언어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짓이다.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면서 만든 시설이나 물건에 ‘배리어 푸리(barrier free)’라는 안내 딱지를 붙이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배려 없는’ 짓이겠는가?

 

나또한 1급 시각장애인이지만, 경향적으로 장애인은 외국어 공부에 불리한데 말이다. 어려운 한자어도 마찬가지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면 특히 공공언어 분야에서 ‘언어는 인권’이라는 관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언어 차별의 가장 나쁜 모양은 ‘차별어’ 사용이다. 내가 서울시청 국어바르게쓰기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바꾼 차별어로 ‘미망인(→ 고 ○○○씨 유족), 정상인(→ 비장애인), 결손 가족(→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편부/편모(→ 한부모), 조선족(→ 중국동포), 녹색어머니회(→ 녹색학부모회), 유모차(→ 유아차, 아기차), 내조/외조(→ 배우자의 도움)’ 등이 있다.


미망인(未亡人)은 ‘죽은 이를 따라 죽지 않은 여인’이라는 원래 뜻에 강한 여성 비하 말빛이 서려 있어서, ‘녹색어머니회, 유아차, 내조/외조’ 등은 고정적 성 역할을 전제로 만들어진 말이고 여성의 사회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바꾸기로 했다. 장애인 외의 사람을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일 역시 장애인을 비정상으로 몰아가므로 바꾸었다. 한글날에 벌인 시민투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말은 ‘결손 가족’이었다.


그런데 이런 차별어를 바라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미망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조’나 ‘유모차’ 같은 말이 애초에 차별하려는 의도로 만든 말이 아니건만, 좀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차별이란 차이를 가지고 약자의 권리나 존엄을 짓밟고 따돌리는 짓인데, 여기에 심하고 약한 정도 차이가 있으니, 이를 싸잡아 ‘차별’이라고 몰아가면 설득력이 떨어지기 쉽다. 이런 관점에서 ‘차별’이라는 때가 묻은 말을 의도적 차별어, 역사적 차별어, 맥락적 차별어 등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게 좋겠다.


첫째, 의도적 차별어는 ‘멍청도, 깽깽이, 검둥이, 숏다리, 김치녀, 맘충’처럼 남을 혐오하거나 놀리려고 원래 이름을 비틀어 부르는 별명 또는 새로 만든 이름들이다. 노골적인 혐오 표현이고, 차별하려고 만든 말이므로 논란의 여지 없이 버려야 한다. 여기에는 너무도 낡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여성을 차별하는 문구와 문장들, 예를 들어 “어디서 여자가...., 여필종부, 암탉이 울면...” 따위도 포함된다.


둘째, 역사적 차별어란 애초엔 차별 의도로 만든 이름이 아니었으나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서 늘 차별의 행위와 함께 거론되므로써 너무나도 심하게 차별의 때가 묻은 이름들이다. 또한 당대에는 인식의 한계 때문에 거의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인권 의식이 발전하면서 가치관이 변화하여 그 말 속에 붙박힌 차별의 구조가 드러난 말들, 예를 들어 ‘처녀작, 처녀림’ 같은 말도 여기에 포함된다.


원래는 그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그 이름이 차별어가 된 대표적인 경우로 장애 영역을 들 수 있다.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 꼽추, 절름발이 등은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을 뿐인데, 그들을 차별하면서 이들 이름에도 차별의 때가 심하게 묻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등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차별의 말빛을 줄임으로써 차별을 줄여가는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물론 말만 바꾼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지만 말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첫걸음이다. 다만, 장애인의 예에서는 버린 말들이 모두 토박이말이고 새말은 모두 한자어인지라 안타까움이 남는다.


셋째, 맥락적 차별어는 사회적 관계와 상황 맥락 속에서 차별의 말빛이 드러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이름들이다. 차별어 순화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영역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성’ 문제에서, 남성 합창단이나 여성 합창단처럼 반드시 성을 내세워야 할 경우가 있다. 심지어 ‘여의사회“처럼 남성 우월적 사회 안에서 약자인 여성의 권리를 높이기 위해 정체성을 구별하여 부르는 이름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여’라는 접두사를 넣게 되고, 그것은 차별의 벽을 허물기 위한 약자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이름일 때도 있다. 다만, 이 차이가 약자에 대한 불평등과 배제로 이어질 때 차별이 일어나므로, 이 두 가지 상황을 잘 분간해야 한다.


맥락적 차별어는 사회적 관계와 상황 맥락에 따라 차별의 말빛이 들락날락한다. 누구를 욕할 때 ”에라, 이 장애인아!“라고 한다면 ‘장애인’이라는 말도 차별의 말빛을 띨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낱말 하나를 놓고 차별어냐 아니냐 씨름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놓고 차별 여부를 가려야 한다.


우리가 옷을 입고 살듯이, 세상의 어떤 존재나 개념, 현상들은 대개 ‘이름’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옷 입는 일에 비유하자면 차별어 순화란 더러운 옷을 빨아 입거나새옷을 지어 입는 일과 같다. 차별의 때가 묻은 말옷 가운데 어떤 말 옷은 빨아 입고, 어떤 말 옷은 빨아도 소용이 없으니 버리고 새 말옷을 지어 입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더러웠지만 남이 자꾸 입혀서 어쩌지 못한 옷이라면 벗어던져야 한다.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