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작가협회-방송작가 2018년 9월호]에 실린 글

 

어디에 서류 낼 때마다 맨 마지막에 이름 적고 도장을 찍거나 이른바 ‘사인(sign)’을 한다. 은행에서 예금을 들 때도, 예금을 찾을 때도 신청서에 그렇게 한다. 서류 작성자가 본인임을 마지막으로 확인해주는 표식이다. 도장 찍는 걸 한자말로 ‘날인’이라고 하니, 손으로 휘갈겨 이름을 적는다는 뜻의 영어 낱말 ‘사인’과 신기하게도 운율이 맞는다. 날인과 사인.
과거에는 문서 작성자 확인 표시로 대개 도장을 썼으나, 요즘에는 인감도장을 요구하는 경우가 아니면 ‘사인’을 많이 쓰는 편이다. 은행에서도 통장에 도장 찍는 일보다 사인하는 일이 더 잦다. 도장 들고 다니는 걸 귀찮아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위조를 막는 데에 사인이 더 든든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문서 서식을 보면 ‘사인’이라고 써 있는 곳은 없다. 모두 ‘서명’이라고 적어 두거나 도장 찍으라고 (인) 표시를 해둔다. 여기서 ‘서명’이라는 말이 이름을 적으라는 뜻인지 사인하라는 뜻인지 헷갈린다. 은행 같은 곳에서 직원이 하라는 대로 하다 보면 “서명하세요.”라고 들었을 때 또박또박 이름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이름의 상징 요소를 끄집어내 나름대로 휘갈겨서 나만의 독특한 표식처럼 만든 ‘사인’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특히, 은행에서는 “이름 쓰고 옆에 서명하세요.”라고 하니까 더욱 헷갈린다.

 

예전엔 “서명 후 날인하세요.”라고 하여 제 손으로 이름 쓰고 도장을 찍는 일이 많았다. 여기서 서명이란 이름을 적는 행위이고, 날인은 도장을 찍는 일이다. 그러니 이름 옆에 서명하라고 하면, 이것은 날인 대신에 사인하라는 뜻으로 다가오는데, 서명은 이름을 적는다는 뜻이니 멈칫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관공서 같은 곳에 내는 서식 용지에 직접 손으로 쓰기보다는 컴퓨터에서 서식의 내용을 채우고 자기 이름까지 타자한 다음에 인쇄하여 그 인쇄한 이름 옆에 서명을 하기 때문에 이름을 쓸지 사인을 할지 더욱 헷갈린다.


서명과 사인을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서명03 (署名)
1. 자기의 이름을 써넣음. 또는 써넣은 것.
2. <법률> 본인 고유의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제3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씀. 또는 그런 것.
사인14 (sign) 
1.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음. 또는 그렇게 적은 문자. ‘서명3’, ‘수결1’로 순화.

 

외국어 낱말인 사인을 서명으로 순화하였기에 대개의 서식에 (서명)이라고 적어놓고 거기에 사인을 하게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사인은 누구나 알아보게 또박또박 쓰는 글씨보다는 남이 알아보기 어려워도 내 나름의 의미를 넣어 추상적으로 도안한 일종의 그림이라는 특징이 강하다. 단순히 이름을 글씨로 적는다는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서명’의 한자도 예상과 달리 서식(書式), 서예(書藝)에 사용하는 ‘글 서’가 아니라 ‘관청 서(署)’라는 점에서 이는 글씨를 쓴다는 뜻만으로 한정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임무나 공식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름을 적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과거에 중국에서는 책이나 문서에 이름을 쓰는 행위에 이 ‘관청 서’를 넣어 말했지만, 오늘날 ‘사인’ 대신에 쓰는 말은 ‘치앤쯔(签字, 첨자, [qiānzì])’ 란다. 일본에서는 ‘서명’과 ‘사인’을 반반씩 쓴다고 하니, 우리는 일본을 따르는 셈이다.

역시 순화어인 수결을 찾아보니 뜻이 이렇다.

수결하다01 (手決--) 
[동사] 예전에, 자기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에 자필로 글자를 직접 쓰다.

 

수결은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 볼 수 있던 서류 결재 절차이자 결재의 표식이다. 관청의 결재 문서에 상급자가 결재하면서 사용하였던 확인 표식을 ‘수결’이라고 했다. 다만 수결은 행위자의 이름을 추상화한 도안이 아니라 누구나 한자로 ‘일심(一心)’을 적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마다 개성이 뚜렷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이름을 또박또박 쓰는 것이 아니므로 오늘날의 ‘사인’과 매우 비슷한 측면이 있다.
사인에는 두 가지 의미 요소가 있다. 하나는 ‘나만의 독특한 표식’, 다른 하나는 ‘손으로 직접 쓰는 행위’의 뜻. 그런데 서명은 뒤엣것을, 수결은 앞엣것을 가리키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는 ‘서명’보다 ‘수결’이 ‘사인’의 순화어로 적절하고, 조금 더 혼동을 줄여줄 것 같다.

 

손으로 또박또박 이름을 써도 되고, 나름의 휘갈긴 이름 모양을 그려 넣어도 효력은 같다. 그렇지만 인쇄 글꼴처럼 단조롭게 이름을 쓰기보다는, 그래도 나만의 독특한 휘갈김이 하나의 손도장처럼 쓰이는 그 맛을 굳이 포기할 까닭은 없다. 물론 은행과 보험사, 카드사에서 “서명하세요.” 또는 “사인하세요.” 하던 말을 어느 날 “수결하세요.”로 바꾸기란 무지막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온 국민의 자잘한 헷갈림이 말 하나 바꿔서 풀어질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니겠는가?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