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와 『조선말큰사전』 편찬

 

한글문화연대 기자단 4기 유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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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는 2017년 571돌 한글날을 앞두고 한글회관에서 『조선말큰사전』 완간 60돌 기념 잔치를 열었다. 『조선말큰사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준비되어 1947년 제1권이 나온 뒤 1957년 제6권으로 완간된 최초의 국어대사전이다. 현재 조선어사전 편찬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말모이>가 제작되고 있다.

 

최초의 사전 편찬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우리는 언제부터 사전을 만들고 사용해 왔을까. 우리말 사전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개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글은 한자 문화권에서 벗어나 ‘국문’으로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1894년 한글이 우리의 공식 문자로 공포되며 우리말을 규범화하는 작업이 필요해졌다. 사전 편찬이 자연스럽게 시대의 과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일본어가 국어가 되었고, 조선어는 피지배 민족의 언어로 위상이 하락했다. 일본은 ‘조선교육령’을 통해 식민지 교육 정책을 발표했는데 일본어 상용화를 언어 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한글 학자들은 ‘언어는 민족의 얼’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말을 연구하고 교육해 조선의 정신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 중심에 지금의 한글학회인 조선어학회가 있다.

 

사전의 탄생 – 조선어학회와 조선어사전편찬회
국문동식회는 1896년 주시경이 새로운 철자법을 통해 어문 규범을 확립하고자 만든 국문 연구회이다. 이 단체는 국어연구학회로 개편되었으며 훗날 이름을 조선어연구회로 바꾼다. 조선어연구회는 1921년 주시경의 제자들이 주가 되어 결성되었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목표로 어문 사업을 진행했고 1927년 학회지인 『한글』을 발간했다. 그리고 조선어연구회는 『조선말큰사전』을 만든 조선어학회의 뿌리가 된다.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학자들이 사전 편찬을 위해 노력했지만 자금이 부족해 결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1929년 이극로와 108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당대 각 분야의 명망가로 사전이 편찬되는데 있어 제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그리고 해방 후 『조선말큰사전』 집대성
일제는 한글 학자들이 사전 편찬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얼을 지키고자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인태를 구속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고 사전 편찬의 중심인물인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조선어학회 지식인 대부분을 구속했다. 실질적으로 사전 편찬이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1945년 9월 8일 우리나라 국어 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한글학회 학자들이 다시 사전 편찬을 하려고 했으나 해방 전 일본 경찰에 사전 편찬을 위해 준비했던 원고 뭉치가 압수된 상태였고 그 원고 뭉치의 소재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수소문한지 20일 만에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원고 뭉치를 찾았다. 2만6천5백여 장 분량의 원고였다. 그 후 2년 동안 수정 작업을 거쳐 1947년 10월 9일 드디어 『조선말큰사전』의 첫째 권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1957년 제6권으로 완간이 이루어졌다.

당시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어는 익숙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언어였고, 조선어는 말할 수 있으나 그 용법에 대한 표준이 없는 언어였다. 현실적으로 조선어 사전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또한 사전 편찬은 일본어가 권력 언어로 자리 잡은 현실에서 조선어를 문화 언어로나마 유지시킬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사전 편찬을 통해 철자를 통일하고 문법을 규범화하는 것을 넘어 억눌려 있는 조선 민족과 그 문화를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사전 편찬은 단순한 어문 정리 사업이 아니라 오늘을 있게 한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 참고문헌: 정철,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 사계절(2017) ]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