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어 남용 막으려면 ‘외래어’ 규정부터 없애야 한다.

 

한글문화연대 소리방송 “이건범의 그러니까 말이야”에서 2017년에는 ‘외래어 심판소’라는 꼭지를 내보냈다. 외국어 낱말 가운데 ‘외래어’ 자격을 줄 낱말을 고르는 방송이었다. 14회에 걸쳐 낱말 세 개씩 모두 42개를 올려 놓고, 지난 25년 동안 언론에서 얼마나 사용하였으며 짝말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쓰였는지 살피면서 방송 진행자 셋이 판가름한 것이다. 심판대에 올린 낱말은 이렇다.


컴퓨터, 인터넷, 이메일, 홈페이지, 네티즌,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모바일, 아이티(IT), 마트, 카트, 포인트, 아나운서, 앵커, 리포터, 리모컨, 에어컨, 히터, 글로벌, 스마트, 디지털, 멘탈, 시스템, 브레이크, 블랙리스트, 가이드라인, 멘토, 게임, 캠퍼스, 팀, 치킨, (가스, 전자)레인지, 미디어, 미팅, 티에프(TF), 워크숍, 개그, 컨셉, 이벤트, 배터리, 벤처, 데이터


심판 셋이 모두 외래어라고 인정하는 낱말에만 외래어 자격을 주었는데, 42개 중에 외래어 자격을 얻은 낱말은 “컴퓨터, 인터넷, 소프트웨어, 아나운서, 리모컨, 에어컨, 디지털, 치킨”의 8개로, 전체의 19%였다. 이 결과를 두고 말이 많으리라. 그렇다. 마땅한 기준과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심의했다고 자신할 수 없거니와, 심판 자격도 우리가 자임한 것이다. 우리 셋은 국어학자가 아니라 시민운동가이니, 이 얼마나 무모하게 보이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 외래어 관리 역사에서 최초의 공개 심의라는 사실을 알면 더욱 놀랄 것이다.


외국어 남용을 줄이자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는 먼저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심지어는 국어학자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는 ‘외래어 미신’부터 걷어내자고 제안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외래어’를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라고 풀이한다. 초중등 국어교육에서는 우리말로 바꿔쓸 말이 마땅치 않아 그대로 쓰는 외국어 낱말을 외래어라고 가르치면서 토박이말, 한자말과 함께 어원에 따라 분류한 우리 낱말의 한 갈래로 친다. ‘피아노, 라디오, 버스’와 같은 외국어가 외래어 자격으로 국어 낱말에 포함된다는 뜻이다. 이게 우리가 배운 국어 상식이다. 하지만 외래어의 실체는 모호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외래어’란 단지 이론 속에만 있을 뿐이다.


낱말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모습과 세력이 변하는지라 어느 특정 시점에서 이게 외래어인지 외국어인지 가르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어느 국어학자도 지금까지 외래어와 외국어를 명쾌하게 나눌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국어심의회조차 외래어를 심의하거나 목록을 발표한 적이 없다. 국어학자 가운데에도 ‘외국어 남용’이라고 해야하는데 ‘외래어 남용’이라는 표현을 써서 국어 낱말의 한 갈래인 ‘외래어’를 뭔가 경계할 대상으로 모는 오류를 저지르는 이가 많다.


외래어 개념의 모호함은 외국어 남용에 면죄부를 준다. 2007년에 정부에서 전국의 2천 개가 넘는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로 이름을 바꿀 때, 나는 대한민국 풀뿌리 행정기관 이름에 굳이 ‘센터’라는 외국어를 넣어야 하겠냐며 반대 운동을 펼쳤었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센터’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외래어이고, 외래어는 국어 낱말 가운데 한 갈래이니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항변했따. 그의 대답에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센터뿐만 아니라 ‘게스트, 가비지, 가이드라인, 고스트, 테크닉, 텐션’ 같은 영어 낱말이 버젓이 올라 있다. 그런 외국어가 <표준국어대사전>에 2만 개가 넘는다는 지적도 있다.


외래어와 외국어의 구분 기준이 모호하고 누구 하나 외래어 목록을 정리하여 발표하지 않으니 이 혼란과 허술함을 틈타 많은 외국어가 우리말을 몰아내고 ‘외래어’라는 시민권을 얻게 된다. 즉, ‘대체할 말이 없는 외국어’가 외래어가 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일부 영어족이 마구 사용하는 외국어가 우리말을 몰아내고 그 외국어가 외래어라는 지위까지 얻어 간다는 말이다. ‘센터’라는 말은 ‘자동차 정ㅇ비소, 민원창구, 보안본부, 복지관, 문화교실’ 대신 ‘카센터, 민원센터, 보안센터, 복지센터, 문화센터’라고 무분별하게 사용되면서 나머지 말을 모두 몰아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외국어 낱말 일부를 우리말의 한 갈래로 끌어들이려 하는가? 그것은 과거 이론의 불가피한 산물일 뿐이다. ‘외래어’는 민족국가의 경계를 세우던 시절, 국어를 건설하고 정비하던 시절, 주민의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지 않던 시절, 주민의 외국어 능력이 거의 백지 상태이던 시절에 새로운 문물과 개념이 한꺼번에 들어와 자리 잡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일 터이다. 특히, 한자 문화권이 아닌 서양에서 근대에 몰려 들어온 말이 주요 대상이었다.


민족어를 국어로 정비하던 근대 초기에는 어원에 따른 ‘구분 정립’이 중요했겠지만, 지금은 ‘공존’의 시대이다. 전 세계가 거의 동시 생활권이고, 외국어 교육 수준도 높아 한국인도 영어를 상당히 많이 알고 생활에서 새로운 개념의 영어 낱말을 쉽게 접하여 옮기고 사용한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중국어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굳이 한국어 낱말로 편입시켜 이중 국적을 지니게 할 까닭은 없다. 하나의 낱말을 모어 사용자도 쓰고 외국 사용자도 함께쓸 뿐이다. 그런 말 가운데 어떤 말은 제나라 말로 바꾸어 쓸 수 있고, 어떤 말은 그게 어려워 그냥 외국어를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외국어 남용을 줄이자고 할 때 그것은 그 낱말이 외국어냐 외래어냐 가릴 필요 없이, 우리말로 나타낼 수 있는 말은 반드시 우리말로 쓰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공공언어에서 외국어 남용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외국어 능력에 따라 국민을 차별하기 때문에 우리의 개념 규정은 더욱 엄밀해야 한다.

 

 

* 2018년 1월 한글학회 [한글새소식 545]에 실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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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