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으로 번기지 쉬운 말] 이건범 상임대표

 

싸움으로 번지기 쉬운 말

'호칭'에서 문제가 되는 건 사회적 지위와 나이에 따라 부르는 말이 구별되어 정해져 있다는 통념이다. 과연 나이와 지위에 따라 호칭을 달리하는 게 적절한 것일까?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섞다가 엉켰을 때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해요?"라고 하면 바로 험악한 답이 돌아온다. "뭐, 당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몇 살이야?" 이쯤 되면 뜯어말려야 한다. 이럴 때 '당신'은 누가 봐도 약간 아랫사람, 나이나 지위에서 나보다 약간 낮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너'라는 말 대신 막돼먹지 않은 말로 쓰는 호칭이다. 일상 대화나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 그리고 문어적인 표현에서는 '너'보다 훨씬 높여주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상하게도 험악한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낮잡아 이르는 역할을 한다.

 

이름 뒤에 붙이는 '씨'라는 호칭성 의존명사는 어떤가? 한때 병원에서 환자를 부를 때 나이와 관계없이 "이건범 씨~"라고 불렀던 듯한데, 이제는 이런 호칭이 거의 다 사라졌다. 주로 회사에서 평사원을 부를 때 뒤에 아무런 직함도 붙이지 않으면 허전해서 붙이고, 사회에서도 특별한 직함이 없는 사람들, 특히 일용직 막노동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씨' 하다 보니, 이 말이 비교적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엿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홍길동 씨~"라고 부르면 건방지다며 화를 낸다.

 

호칭으로 사용할 때와 언론 등에서 지칭으로 사용할 때에는 말빛이 상당히 다름에도 대통령의 부인에게 '씨'와 '여사'중 무엇을 붙이느냐로 논란이 불거진 건 호칭 쪽 쓰임새 때문일 것이다.

 

성공한 호칭, '님'
우리 사회의 호칭은 무정형의 다중 속에서 신상을 잘 모르는 개인을 부를 때와 서로 신상 정보의 일부를 알고 있을 때로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병원, 은행, 민원창구 등의 환경이 앞엣것에 해당하고, 직장과 동아리와 사교 모임 등이 뒤엣것에 해당한다.


무정형의 다중이 모이는 곳에서는 이름 뒤에 '님'이라는 의존명사를 붙이는 것으로 호칭이 정리되고 있다. '씨'를 대체한 이 호칭은 그다지 거부감 없이 거의 모든 곳에서 잘 사용된다. 이는 이 호칭이 1990년대 초반 컴퓨터 통신이 활발해졌을 때 누리꾼들이 자율적으로 정한 통신 예절에서 일시에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나이나 외모, 사회적 지위 등을 전혀 모르는 통신 공간에서 별명 뒤에 누구나 평등하게 '님'을 붙이는 것이 호칭상의 복잡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이었던지라 대부분의 누리꾼이 이런 통신 예절을 받아들였다. 이 예절이 병원 등의 실생활 현장에도 퍼진 것이다.


따라서 나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일일이 따질 수 없는, 또 그럴 필요가 없는 공간에서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게 공평하고 분명한 예절로 자리잡았다. 다만, 한 번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고 난 후에도 계속 그리 부를 것인가는 좀 생각해 볼 문제다. 중국에서는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성에 붙여서 쓰거나 그것만 써서도 앞에 있는 사람을 높여 부른다. 
 

우리도 '선생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는 하는데, 이 말이 '학교 교사'와 겹치는 뜻인지라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도 비교적 이 말이 눈앞의 사람을 부를 때 "이건범 선생님, 이 선생님" 또는 "선생님"과 같은 식으로 꽤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이 호칭은 친분관계가 없는 경우와 친분관계가 있는 경우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 대신 중년부터는 남성에게 '아버님', 여성에게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늘고 있는데, 이 호칭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실수를 저지를 위험도 있고 가끔은 듣는 이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기도 할뿐더러 친부모나 친구 부모에게 쓸 호칭을 너무 널리 쓰는지라 가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호칭이 주는 가식은 '사장님, 여사님' 따위의 과장과 남발에서 극에 이른다.

 

가까운 사이에도 '님'을 쓸 수 있을까?
가까운 사람들, 즉 서로 신분이나 개인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야말로 호칭 문제가 매우 불편하다. 지금까지 내려온 관행은 직함 뒤에 '님'을 붙이는 것이다. '이건범 사장님, 이건범 대리님' 하는 식이다. 잦은 대화에서는 그저 직함 뒤에 ‘님'만 붙이면 되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문제는 직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또는 그런 직함과 무관하게 동아리나 사교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어떤 호칭을 붙일 것이냐이다.


직장에서는 직함 없는 이에게 '씨'를 붙이는 곳도 있고 '님'을 붙이는 곳도 있다. 그런데 '씨'라는 의존명사가 호칭에서는 이미 낮은 사람이라는 말빛을 강하게 띠고 있으므로, '님'으로 가는 게 직함 있는 사람들과의 인간적 차별을 줄이는 방법일 것 같다. 직장은 오히려 쉽다. 문제는 주부처럼 직함이 없거나 직함이 서로 통용되지 않는 경우다.


비공식 조직인 동아리나 사교 모임에서는 나이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편이다. 이런 곳에서는 친한 정도에 따라 서로 거북살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부른다. 친하면 '형님, 누님, 오빠, 언니'가 자연스럽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나이 많은 사람에겐 '선생님'이나 이름 뒤에 '님', 또는 사회적 직함 뒤에 '님'을 붙인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는 '씨'를 붙이는 편이다. 주로 이런 관계에서 나이를 놓고 신경전을 많이 벌인다.


여기서 문제는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서 '이건범 님'이라고 불렸을 때 기분이 어떨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성 간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나이에 따른 서열 정리는 동성 간에 더 강하게 작동하므로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이 호칭이 통하게 될지 궁금하다. 나이 많은 사람이 동성의 나이 어린 이에게 '씨' 대신 '님'을 자연스레 붙일 수 있을지도 실험 대상이다.

 

있는 걸 없애기보다 없는 이에게 새 호칭을
권위주의를 없애기 위해 높임말을 없앨 수는 없다. 전통적인 직함은 사라질 수 있지만 직함 자체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직함 있는 사람들에게는 직함 뒤에 '님'을, 직함 없는 사람에게는 나이와 무관하게 이름 뒤에 '님'을 붙이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것이 나이와 호칭 등에 따른 쓸데없는 갈등을 없애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과거에 이를 도입하여 추진한 기업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실감 같은 것을 고려할 때 직함 없는 사람들에게 붙여줄 통합 직함 같은 걸 만들어 쓰자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평사원은 '선달', 비전속인(프리랜서)은 '금달', 주부는 '아리달', 은퇴자는 '은달' 식으로 말이다. 그 뒤에 '님'만 붙이면 기존에 직함 있는 사람들을 부르는 방식과 같아지니, 호칭 때문에 생길 마음고생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 한국어문기자협회에서 발행하는 <말과 글/2017년 가을 제152호>에 실린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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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