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좋은 나라-68] 김영명 공동대표

 

그동안 한국에서 제기되어 온 반미의 구체적인 행동들에 대해 검토해 보자. 여기서 관심은 우리 사회에 지금 얼마나 반미적인 행동이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대한민국의 역사를 간단히 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어느 면에서 결코 친미적인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제거하려고도 하다 그만두었으며(1952년의 에버레디 계획),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수없이 반항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승만이 반미주의자가 아니었던 것도 확실하다. 대한민국의 생존이 미국에 달려 있었던 상황에서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그 뒤를 이은 장면은 친미적인 인물이었고, 박정희는 이승만과 같이 복합적이었다. 쿠데타로 장악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정부의 호의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친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정권 말기에 들어서는 미국 정부와 마찰을 빚고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의 역대 정부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여러 다른 측면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체를 보자면 근본적으로 한국의 정부들은 친미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국가 안보뿐 아니라 각 정권들이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미국의 지원과 반공 정책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민주화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들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나 유지가 국가와 정권 모두에게 필수적이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대중을 싫어하여 홀대하였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한미 관계가 어색해지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정부들은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토대로 친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사실은 비단 정부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지배층, 주류, 엘리트 또는 무슨 말로 일컫든 힘과 돈과 지위를 가진 계층에서 마찬가지였다. 대중도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것이 한국 사회의 보수성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보수성이 반미에 대한 최근의 우려가 일어나게 된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1980년에 일어난 비극적인 광주 항쟁 이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대외정책 근간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한국 사회에서 큰 흐름으로 나타났다. 1980년 중반 이후 거세게 일었던 민주화 운동은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정부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민중 민주 운동은 반미 자주화 운동과 함께 일어났다. 이 운동은 ‘반미’를 분명한 기치로 내걸었고, 사회주의 체제 건설까지 꿈꾸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반미 운동이었다. 그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그런 급진적인 운동은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세력을 잃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결과는 정치체제의 보수적 민주화로 나타났고, 그에 따라 운동권 급진 세력들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그 당시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한국에서 진정한 반미 운동이 힘을 얻었으나 그것이 보수적 지배 구조를 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한 급진적인 반미 운동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사회적 충격을 주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종북주의자’들로 보이는, 2014년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등 급진파들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수는 있으나 아무런 실질적인 충격을 주지 못한다.    

 

그러면 2000년대 이후 일어난 이른바 반미 운동은 어떤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두 여중생의 죽음이 촉발한 촛불 시위다. 그 당시 일어난 촛불 시위에는 불법적인 요소가 많았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말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법을 어겼다는 점에서 그 촛불시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반미적인 시위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당시 촛불 시위대가 요구한 것은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이었다. 시위 주동자들은 군중 시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반미로 매도당하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 시위가 반미 시위로 변질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용의주도했거나 아니면 소심했다. 미국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가, 아무리 규모가 컸든 법적인 문제가 있었든 또 무질서가 있었든(실제로 별로 없었다), 반미로 규정될 수는 없다. 실제로 시위 주동자들은 시위에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나오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다고 한다. 반미 시위로 매도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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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