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바르게, 넉넉하게"


국어 운동이나 국어 정책 분야에서는 처음 다루는 주제인데다 선진국의 앞서간 경험에 빗대어 펼쳐지는 학술회의라 그런지 참가자들의 관심은 꽤나 뜨겁고 진지했다.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을 기념하여 2013년 10월 7일 낮 1시 30분부터 열린 언어정책 국제회의에는 애초 예상했던 청중 200명보다 30여 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빼곡하게 의자를 더 놓아야했다. 6시까지 4시간 30분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마쳤을 때도 청중석에는 100여 명이 넘는 청중이 남아 있었다. 종합 토론 시간이 짧아 충분하게 토론하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쉬운 언어 정책과 자국어 보호 정책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한글문화연대가 연 이 언어정책 국제회의는 “쉽게, 바르게, 넉넉하게”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한글문화연대가 바라는 국어운동과 국어정책의 과녁을 세 낱말로 밝힌 것이다. 김명진(한글문화연대 운영위원)의 사회로 펼쳐진 이날 회의 첫머리는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상임대표의 짧은 인사와 함께 567돌 한글날을 맞아 한글문화연대에서 제작한 음반 발표로 시작되었다. 테너 임정현이 부른 “그날엔 꽃이라”(이현관 작곡, 이건범 작사)가 아름답고도 장중하게 끝난 뒤 격려사에 나선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정책국 나종민 국장은 문화 융성의 시대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알기 쉬운 공공언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이 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쉬운 언어 정책부터 시작해야 : 이건범 대표

회의 구호 “쉽게, 바르게, 넉넉하게”를 제목으로 내걸고 10분 가량 진행한 대회사에서 이건범 대표는 한국의 언어 환경이 어떤 특수성을 갖고 있는지 훑고, 근대화 시기에 몰려들어와 지식과 정보의 핵심 언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식 한자어와 198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와 세계화 흐름 속에서 새로이 밀려오는 영어가 한국의 공공 언어에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부른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자국어 풍부화 정책과 쉬운 언어 정책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그는 쉬운 언어 정책에 초점을 두어야 함을 힘주어 말했다. 자국어 풍부화 정책을 자동차의 엔진으로, 쉬운 언어 정책을 자동차의 바퀴로 비유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엔진과 바퀴가 모두 부실하다고 우왕좌왕해서는 단 100미터도 더 갈 수 없습니다. 저는 바퀴, 즉 쉬운 언어 정책에 먼저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엔진이 꺼진다면 그나마 사람들이 밀어서라도 정비소에 갈 수 있겠지만, 바퀴가 모두 터진다면 우리는 1미터도 차를 밀고 갈 수 없습니다. 먼저 바퀴를 갈아야 합니다. 원활한 의사소통,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는 헌법 정신, 민주주의와 인권의 보호 등을 추구하려할 때 비로소 우리는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와 숨죽이고 있는 요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지지와 요구가 쉬운 언어 정책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전문 용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결코 전문 용어 한국어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학문적 양심에 따라 전문 용어 한국어화에 힘을 쏟고 있는 극소수의 지식인마저 지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또한 쉬운 언어 정책의 사상적 뿌리를 외국의 경험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애민, 소통, 민본 정신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어운동과 정책의 뿌리를 새로이 조명하였다.


■ 쉬운 언어 운동과 정책의 경험 : 영국과 스웨덴



국제회의 첫 발표자로 나선 영국령 지브롤터 공화국의 변호사 피터 로드니는 “쉬운 영어 캠페인의 경험”이라는 주제로 30분 동안 영국의 경험과 교훈을 소개하였다. 1970년대 초반부터 크리시 메이어라는 한 여성이 주도하여 마침내 1979년에 ‘쉬운 영어 캠페인’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영국의 정부와 정치권, 법조계, 산업계에 쉬운 영어 바람을 불러일으킨 역사와 요령이 하나씩 드러났다. 이 운동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기까지, 그리고 영국의 법률과 유럽연합 회원국 정부 정책에 반영되기까지의 활동이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쉬운 영어가 단지 낱말 수준의 운동이 아니라는 점도 밝혀졌다. 문서를 읽는 대상과 글을 쓰는 목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권장하는 다양한 문장 구사 기술 등도 소개하였다. 토론에 나선 김슬옹 박사(한글학회 연구위원)는 날카로운 질문과 비평 일곱 가지를 던졌는바, 그의 질문 하나하나가 우리 국어운동의 논쟁점이 될 만한 것이었다. 



두 번째 발표자인 스웨덴 문화부 언어위원회의 에바 올롭슨은 “쉬운 언어와 스웨덴의 언어정책”이라는 주제 아래 쉬운 언어가 공론장에서 시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밑으로부터 운동이 시작된 영국과 달리 스웨덴의 쉬운 언어 정책은 정부 내에서 ‘쉬운 스웨덴어 그룹’이 만들어져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된 양상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2009년에 언어법을 제정하여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사법부의 판결문을 소송 당사자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조사하는 등 정부의 쉬운 언어 정책에 관한 실행 성과를 평가하고 보완하는 순환적인 관리 방식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토론에 나선 법제처 알기쉬운 법령 용어팀 김혜정 서기관은 법제체가 정부 입법 법률에서 한자를 모두 한글로 바꾸고 어려운 용어를 순화하는 노력을 진행한 사례들을 소개하였다. 






■ 자국어 풍부화 : 프랑스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선 프랑스 언어총국의 베네딕트 마디니에는 “언어 정책과 프랑스어의 풍부화”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의 전문용어 정비 작업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일상 용어가 빙산의 수면 윗 부분이라면 전문용어는 수면 아래 부분이라며, 과학기술 및 각종 학술 용어에서 자국어로 사고할 체계를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이 작업을 총리 산하 ‘전문용어와 신조어 총괄위원회’에서 총괄하고 있는데 각 부처에 있는 ‘전문용어와  신조어 전문위원회’에서 전문가들이 논의하여 올린 용어를 검토한 뒤 마지막으로 프랑스 학술원과 합의하여 새로운 용어를 프랑스어로 정의한다고 한다. 이런 제도적 장치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일을 문화부 안의 ‘프랑스어와 프랑스 언어들의 총국’에서 맡고 있다. 영어의 공세 속에서 프랑스어로 전문용어를 만들어내는 일 가운데에도 가장 중요한 일이 일시적인 유행어에 대응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낱말을 선별해내고 이의 의미를 명확히 정의하는 일이라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마디니에는 이런 활동을 프랑스어의 풍부화라고 표현한다. 



토론에 나선 서울종합과학대학원대학교 이현주 교수는 프랑스의 이런 노력을 언어 순화가 아니라 ‘수월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즉 전문가들을 위한 전문용어 정비가 아니라 전문영역과 일상영역이 만나는 곳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전문용어를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일반인의 지식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프랑스가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말이다. 



■ 한국의 국어정책과 쉬운 언어 운동의 주체 : 한국

마지막 발표자로 나선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전 국립국어원장)은 “한국 국어정책의 미래”라는 주제로 생태주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국어정책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소개하고 극복 방안을 내놓았다. 특히 서울 중심 표준어 정책이 방언의 풍부한 토양을 죽임으로써 조어 생성 능력을 퇴보시킨 점,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점, 외래어 규정의 허술함이 외국어 유입을 부추기는 점 등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았다. 대안으로는 어문규범의 모순을 해결하는 일과 정보기술에 의지하여 사전 작업을 민관 협력으로 활성화할 필요성, 전문용어 표준화 등을 제시하였다. 토론에 나선 한림대학교 김영명 교수(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자국어 풍부화 정책이 쉬운 언어 정책과 같은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현재 한국의 지식인층에서 널리 퍼져있는 외국어 남용 현상이 매우 오래된 사대주의와 지식인이 대중과 자신을 구별하려는 군림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쉬운 언어 운동 역시 깨어있는 지식인 중심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언어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힘주어 말했다. 





■ 종합 토론은 조금 아쉬워

한림대학교 조형근 교수(일본지역연구소)의 사회로 진행된 3부 종합토론에서는 청중석의 질문과 토론자의 질문 등을 종합하여 몇 가지 유형으로 발표자에게 답을 구하였다. 여느 토론회나 학술모임에서 자주 보는 청중석의 엉뚱한 질문이나 주장이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없었지만, 아직 외국 발표자들과 한국 토론자 및 청중과의 교류가 시작 단계라서 그런지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하지 못한 점이 약간 아쉬웠다. 관심이 높았던 만큼 질문도 많았지만, 질문의 깊이와 넓이를 다 소화하기에는 외국 발표자들의 준비도 약간은 모자라보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상황 설명일 것이다. 


어떤 문서로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이가 ‘쉬운 언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자리였다. 외국의 앞선 경험은 생각할 거리를 상당히 많이 제공해주었고, 그런 경험을 한국의 맥락에서 어찌 소화하고 바꾸어 적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범 대표가 대회사에서 말했듯이 일단 문제점을 깨닫고 길을 찾아 나선 바에야 그 다음 문제는 오로지 꾸준하고 대담한 실천만이 답을 줄 것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이 국제회의 발표 자료를 좀 더 다듬어 2013년 12월쯤에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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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