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과서 한자 표기, 헌재 결정 거슬러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 이 글은 2016년 12월 26일, 경향신문에 실렸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262105005&code=990402

 

한자혼용을 원하는 분들이 공문서 한글전용을 규정한 ‘국어기본법’과 중·고교 한문 교육을 선택 과목으로 돌린 ‘교육과정’이 위헌이라며 청구한 심판 사건에 헌법재판소가 모두 기각 결정을 내렸다. 지난 11월24일의 일이다. 이로써 한글을 나라글자로 밝힌 고종 칙령 이래 120여년의 과도기를 거쳐 한자 시대에서 한글 시대로 완벽하게 옮아왔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시빗거리는 남아 있다. 교육부가 2014년 9월부터 추진하려다 미루고 있는 초등교과서 한자 표기 문제다. 교과서 본문에 한자를 병기하려다 여론의 거센 반대에 밀려 본문 바깥에다 주요 한자어의 뜻을 풀이하겠다는 쪽으로 우회로를 뚫고 있다. 이는 헌재 결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번 결정에서 교과용 도서의 한글전용을 문제 삼은 청구는 심의할 필요조차 없어 각하됐다.


헌재에서는 “낱말이 한자로 어떻게 표기되는지를 아는 것이 어휘능력 향상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중·고교 한문을 선택 과목으로 돌린 교육과정이 위헌이라고 본 소수 재판관조차 초등학교 한자 교육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중학교부터 한문을 필수 교과로 가르치라 권했다.


지금도 공문서든 교과서든 의미 전달에 혼란이 일어날 경우에는 한자 및 외국 문자의 병기를 허용한다. 이런 예외적 병기 조항이 있음에도 교육부가 한자 표기 정책을 들이미는 건 한자를 ‘예외’가 아니라 ‘기본’으로 삼으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방침은 “한자어는 한자를 알아야 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한자혼용론자들의 주장을 전제로 깔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난(非難)’의 한자는 ‘아닐 비, 어려울 난’이어서 낱말 뜻과 멀고, ‘헌법(憲法)’은 ‘법 헌, 법 법’이어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이런 한자어가 초등교과서 한자어 가운데 68%이고, ‘부모(父母)’, ‘선악(善惡)’처럼 의미가 투명한 한자어는 32%에 불과하다.


인지과학계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한자 지식은 자주 볼 수 없는 저빈도 한자어 가운데 훈을 더하여 낱말 의미와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에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때도 한자 표기는 필요 없고 훈(뜻)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한자어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한자 암기를 낱말 이해의 주된 방법으로 오해하게 할 ‘교과서 한자 표기’는 조기 사교육과 학습 부담만 키울 위험이 높다. 시행해서는 안 된다.

글 올린 이: 한글문화연대